어제 교보문고에 나갔다가 뜻밖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스포츠와 관련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앞쪽에 나이 지긋한 분이 서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고개 숙인 모습.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었습니다.
한때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김승옥 선생.
아니, <무진기행> <1964년, 그해 겨울>의 작가 김승옥.
그 분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체를 쉽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몇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설마 했던 것이지요.
'저렇게 건강하게 재활하셨을 리 없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눈길이 그분에게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분이 책장을 넘기는 틈을 타서 말을 건넸습니다.
"저, 혹시 김승옥 선생님 아니세요?"
고개를 드는 순간, 그분의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제 얼굴도 호박같이 둥글넙적하게 퍼졌습니다.
얼굴에 주름이 조금 늘고 머리에 백발이 성성했지만,
15년 전에 자주 뵙던 김승옥 선생님이 맞았습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반갑게 내뱉는 말들은 고장난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처럼
토막토막 나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제야 저는 선생님이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언어 감각을 상실했다고 간파했습니다.

제 짐작이 맞았습니다.
선생님은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더니 거기에 몇 자 끄적였습니다.
뇌졸중.
그렇게 쓰신 뒤 선생님은 손짓으로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웃고 있었지만, 제 마음은 어지러웠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에게 말이란 또다른 의미일 테니까요.
정말 다행스러운 점은
선생님의 의식과 글이 아직 또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음달부터 <샘터>에 글과 그림을 연재하게 되었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에 마감 날에도 원고를 못 쓰셔서
담당 기자들을 꽤 고생시켰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선생님에게 글 쓰기는 재활 이상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아쉽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앞이 뿌얘졌습니다.
'천재 김승옥'의 오늘이 애달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믿습니다.
전성기의 때의 필력을 보일 수는 없겠지만,
특유의 천진함과 따뜻함으로 또다른 세계를 창조하시리라~.  
선생님, 내내 건강하십시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Posted by 노마윤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08.09.05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강혜진 2011.01.13 1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존경하고 흠모하는 김승옥 선생님을 가까이 뵈셨다니요. 더욱 건강해 지시길 기도드립니다.